대한민국 승인 외교 ①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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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승인 외교 ① 건국 이후 대한민국을 승인한 나라는 없었다. 미국도 유엔 총회의 결과를 보아 가면서 승인하고자 했다. 최초로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도 “미국 대사”가 아니라 “미국 대표”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1948년 9월 21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제2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승인받는 일이었다. 전망은 불투명했다.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권 블록은 당연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연방 블록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구한말에서 대한민국 건국 초기까지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 영국이라는 나라에 다소 유감을 갖게 된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6.25 전쟁에서도 한국을 포기하자고 미국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미국이 우리 임시 정부의 승인을 끝까지 거절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영국의 입장을 의식해서였다. 건국 이후 국회 의원들의 발언을 보면, 영국을 성토한 대목도 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영국을 위시한 영연방 국가들이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린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세상사에는 이렇게 양면(兩面)이 있기 마련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 참석할 한국 대표단의 단장에 장면(張勉)을 임명했다. 당시에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조병옥(趙炳玉)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무명(無名)인 장면이 단장으로 발탁된 것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호탕한 조병옥이 실수할 것을 이 대통령이 염려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동시에, 장면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가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는 설명도 있다. 어쨌든 장면의 발탁은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외에도 김활란, 장기영, 모윤숙, 정일형이 파견되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발한 외교 사절의 기록을 읽어 보면, 눈물과 웃음이 교차한다. ‘훌륭한 애국자들이 참 애쓰셨구나’ 하는 생각과, ‘그때는 정말 못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동시에 든다. 이 나라 최초의 여권(旅券)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일단 여권 자체도 한국에서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인쇄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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