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대전환 ③, ④, ⑤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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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전환 ③ “세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나는 다수의 뜻에 따르는 체제로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제도, 대의(代議) 정부, 자유 선거, 개인의 자유, 언론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다른 하나는 소수가 다수에 강제(强制)한 삶의 양식인 바, 테러와 압제를 동원하여 신문과 라디오를 통제하고 선거를 조작하며 개인적 자유를 탄압한다. 나는 무장된 소수나 외부 세력이 자유민들을 복속시키겠다고 달려들 때 이에 저항하는 그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자유민들을 도와서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공산주의와의 대결 선언이었다. 어설프고 성과도 없이 이용만 당했던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하고 정면 대결로 나간다는 방향 전환이었다. <뉴스위크>는 이 역사적인 연설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만약 말(言)이 국가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이 연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예측이었다. 트루먼의 연설 이후로 인류의 역사가 다시 쓰였다. 미주리주의 농촌 출신으로, 순박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품성을 지녔던 트루먼은 자신의 연설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서 유럽과 미국의 집단 안보를 강화하고, 마셜 플랜으로 유럽의 전후(戰後) 복구를 도왔다. 트루먼 독트린은 적과 동지를 뒤집어 놓은 결과를 초래했다. 2차 대전의 동료였던 소련은 적군이 되었고, 적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아군이 되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민주화하여 경제를 부흥시키면서 이 두 나라가 서방 편에 서도록 유도한다.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이니, 1917년 공산 혁명 이후 30년 만이다. 미국이 소련의 실체를 직면하고 대결을 선언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1917년 무렵부터 확고한 반공을 선언했다. 이승만이 미국보다 30년을 앞서간 것이다. 30년을 기다리느라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했다.(계속)
1947년, 대전환 ④ 늦은 감이 있지만, 트루먼 독트린은 대한민국의 운명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되지도 않을 좌우 합작이나 소련과의 합의에 매달리는 정책을 점차 포기한다. 따라서 좌우 합작에 반대하고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는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의 입지가 강화된다.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세계사의 대세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뜻밖에도 남한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를 재촉하게 된다. 유럽에 들어가는 경비가 큰 폭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극도의 빈곤이 공산당의 기반을 만들어 준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마셜 플랜(The Marshall Plan)이라는 원조 계획을 세우고 모든 재력을 유럽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경비를 더욱 삭감하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1947년 가을부터 미국은 한국으로부터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철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명예를 지키면서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방법은 유엔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하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는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43대 0, 만장일치였다. 결국 1947년은 이승만의 미국 방문으로 시작하여, 한반도에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는 유엔의 결의로 끝났다. 이로써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들의 신탁통치는 무효가 되어 버렸다. 이승만을 만났던 힐드링은 국무부의 피점령 국가 담당 차관보에서 은퇴한 뒤인 1949년 1월 6일,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소련의 비위를 건드릴까 두려워서 신탁 통치 협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못했던 미국의 관리나 언론인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설득해 나간 것은 이승만, 올리버, 그리고 임병직의 끈질기고도 참을성 있는 노력이었다. 그들은 한국 문제를 정직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계속)
1947년, 대전환 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십자군 운동이었다. 지금도, 치를 떠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뒤집어엎던 기억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를 채운다. 이승만과 그의 참모들은 미국이 강대국 소련을 다루는 편법적인 방법을 버리고 약소국 한국에 대해 정당하고도 의로운 태도를 취하도록 일에 매달렸다. 이승만 박사는 그 일을 해 냈고, 미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처럼, 1947년은 대전환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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