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대전환 ①, ② | 안준근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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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전환 ①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특유의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했다. 하지의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그는 언론과 미국 정계, 특히 한국 문제를 취급하는 국무부를 대상으로 집요하고 열정적인 설득 작업에 나섰다. 국무부에 제출한 건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독립 요망은 즉시 성취되어야 하며, 만일 그러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인의 인내는 최후 단계에 달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는 즉시 허용되어야 한다. 즉,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한국의 탄생이야말로 극동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전 세계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쟁이 야기될 것이다.”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 데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올리버가 1943년에 쓴 책의 제목은 “잊혀진 나라 한국”이었다. 제목 그대로 한국은 미국에게 잊혀진 나라였다. 하지만 특급 외교가 이승만의 활약은 잊혀진 나라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계속)
1947년, 대전환 ② 이승만을 통해서 <뉴욕타임즈> 등 주요 언론 매체들은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북괴군 50만이 남침을 준비 중이다,” “하지(John R. Hodge)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든가 아니면 소련과 함께 물러가라,”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한에 군정을 인계할 과도 독립 정부가 수립될 것” 이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워싱턴 정가에서 ‘코리아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유영익, 유영익 편. p.505) 독립 운동가 시절,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이승만을 한국 국민들의 지도자로 대했다. 국무부 피점령국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John Hildring) 장군은 맥아더와 절친했으며, 평소 이승만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힐드링의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이승만이 가졌던 오랜 불안은 미국이 한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소련에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을 방문하고 힐드링을 만나면서, 이승만의 불안은 사라졌다. 이제 그의 관심은 한국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구실 아래 독립이 지연될 것이라는 생각에 쏠려 있었다. 그때 또 한 번 세계 정세의 타이밍이 이승만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오랫동안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협력적인 태도를 취해 왔던 미국의 정책이 하루 아침에 뒤집혀 버린 것이다. 발단은 그리스와 터키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 세력은 그리스의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소련은 터키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여 서방 국가들을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같은 편에 선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하는 전략상의 일대 변화였다. (조갑제, <조갑제 닷컴>. 2010.3.16.)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rine)’으로 역사에 남은 연설은 1947년 3월 12일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18분 동안 이어졌다. 트루먼은 그리스와 터키를 도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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